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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맹부(趙孟頫) -

- 생몰년 : 1254?~1322
- 국    가 : 중국


趙孟頫 1254?~1322

중국 원(元)나라(1271~1368)의 화가이며 서예가.

자(字)는 자앙(子昻), 호(號)는 집현(集賢)⋅송설도인(松雪道人), 시호(諡號)는 문민(文敏).

저장성(浙江省) 우싱현[吳興縣, 지금의 후저우(湖州)]에서 태어났다.

송(宋)나라(960~1270)의 창건자인 태조[太祖, 927~976, 중국 북송의 초대 황제. 조광윤(趙匡胤). 재위 960~976]의 후손으로 종실(宗室) 출신이면서도 1286년 새로 들어선 이민족 몽골족의 원나라가 지배하는 조정(朝廷)에 출사(出仕)하여 영달하였으므로,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세조(世祖, 1215~1294, 중국 원나라의 제5대 황제. 재위 1260~1294)에게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고, 한림 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영록대부(榮祿大夫)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추봉(追封)되었다.

문인화(文人畫) 초기의 대가(大家)로 존경을 받았는데, 문인화파는 자연의 현실감 있는 묘사보다 개인적인 표현을 추구하였던 화파이다.

당시의 대표적인 교양인으로 정치⋅경제⋅시(詩)⋅서(書)⋅화(畫)에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서화(書畫)에 뛰어났다.

서예에서도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의 품격이 높았으며, 안진경(顔眞卿, 709~784?,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이래로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던 서풍(書風)을 배격하고 왕희지(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의 서예가)의 전형(典型)에 복귀할 것을 주장하여 당시 복고주의(復古主義)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그림은 남송(南宋, 1127~1279)의 원체화(院體畫)풍을 타파하고, 당(唐)나라(618~907)⋅북송(北宋, 960~1126)의 화풍(畫風)에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그림은 송나라와 그 화원(畫院)이 붕괴된 뒤 옛 거장(巨匠)들의 주제와 양식에서 끌어 낸 새로운 다양성과 관심으로 그려진 그림 가운데 초기 작품 예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당나라의 한간(593)의 양식으로 말[馬]을 그렸으며, 산수⋅화초⋅죽석(竹石)⋅인마(人馬) 등에 모두 뛰어났고, 그 밖에 다른 동물도 그렸다.

주제에는 의도적으로 단순화된 색채 및 구성, 도식적이며 유치하기까지 한 형태와 규모의 변형을 통하여 피상적인 아름다움을 전반적으로 제거시킨 것이 드러나 있다. 또한 고풍적인 것과 다양한 운필(運筆)의 전개를 보여 준다.

화우(畫友)이며 문인(文人)인 왕연(349)⋅전선(512)⋅진중인(陳仲仁) 등과 ‘우싱파(吳興派)’라는 한 파를 이루었고, 오진(327)⋅왕몽(341)⋅황공망(620)과 더불어 이른바 ‘원말 4대가(元末四大家)’로 손꼽히며, 고극공(31)⋅이간(390)과 더불어 원나라 초기 대나무 그림의 3대 명가(名家)로 일컬어진다.

그림으로 [사마도권(飼馬圖卷)]⋅[이양도(二羊圖)](워싱턴 프리어 미술관<Freer Gallery of Art, Washington D.C.>)⋅[임왕유망천도(臨王維輞川圖)](런던 대영 박물관<大英博物館, British Museum, London>)⋅[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1295년, 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臺北國立古宮博物館>)⋅[중강첩장도(中江疊嶂圖)] 등이, 글씨로 [여중봉명본척독(與中峰明本尺牘)] 등이 있다.

아내 관도승(管道昇)은 묵죽(墨竹)에 이름이 있었고, 아들 조옹(趙雍, 1289~?)도 산수⋅화조화가(花鳥畫家)이며 서예에도 탁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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