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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북(崔北) -

- 생몰년 : 1712~1786
- 국    가 : 한국


崔北 1712(숙종 38)~1786(정조 10)

조선(朝鮮, 1392~1910)의 화가.

초명(初名)은 식(埴), 자(字)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號)는 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其齋)⋅삼기재(三奇齋)⋅기옹(寄翁)⋅월성(月城)⋅자은(坐隱)⋅반월(半月)⋅호생관(毫生館),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계사(計士) 최상여(崔尙餘)로, 기술직 중인(中人)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47년(영조 23년) 이성린(427)과 함께 통신사(通信使)의 수행 화가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서울의 여항(閭巷) 출신으로 강세황(20)⋅신광수(申光洙, 1712~1775, 조선의 문인)⋅신광하(申光河, 1729~1796,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 신광수의 아우)⋅이광사(394)⋅이용휴(李用休, 1708~1782, 조선의 실학자)⋅이익(李瀷, 1681~1763, 조선의 학자)⋅정범조(丁範祖, 1723~1801, 조선의 문신) 등 당시 정치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남인(南人)⋅소론계(少論系)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문사(文士) 지식의 표방에 따른 초세적(超世的) 친(親)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의 실천과 함께 사의적(寫意的, 외형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그린다는 뜻으로, 수묵화나 문인화가들이 이러한 경지를 추구하였다.)인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畫)풍을 구사(驅使)하는 등 시(詩)⋅서(書)⋅화(畫)를 겸비한 본격적인 직업 화가로 활약하였다.

키가 몹시 작았고 매섭고 괴팍한 성격과 오만하고 기이한 행동 때문에 광생(狂生)으로까지 지목을 받으며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한쪽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는데, 어떤 귀인(貴人)이 최북에게 강제로 그림을 요구하자 ‘남이 나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라고 하며 스스로 한쪽 눈을 칼로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금강산(金剛山) 내금강(內金剛)의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러 ‘천하 명인(天下名人) 최북은 천하 명산(天下名山)에서 죽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뛰어내렸다는 자살 소동은 성급하면서도 거침없고 활달한 그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 준다.

시(詩)에도 뛰어났으며 술을 매우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周遊)하였으며, [서상기(西廂記)]⋅[수호전(水滸傳)] 등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이른바 ‘원말 4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620)의 필법(筆法)을 존경하였다.

강세황과 더불어 심사정(281)⋅정선(522) 다음의 대가(大家)로 손꼽혔던 그의 작품은 산수(山水)⋅화조⋅초충(草蟲)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최순(崔鶉)’이라고 불리었고,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라고도 불리었다.

작품은 강세황과 심사정의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치졸한 듯하면서도 소박하고 정감 어린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만년(晩年)에는 거칠고 분방한 기질과 상통되는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개성을 이룩하였고, 남공철(南公轍, 1760~1840, 조선의 문신이며 문장가)⋅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의 문신이며 북학(北學)의 대표적인 학자]⋅유련(柳連) 등 북학적(北學的) 성향을 띤 지식인들 및 이단전(李亶佃, 1755∼1790, 조선의 천민 시인), 화원 김홍도(110) 등과도 교유(交遊)하였다.

작품으로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36.1×31cm, 개인 소장)⋅[금강표훈사도(金剛表訓寺圖)](57.5×38.5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미법 산수도(米法山水圖)](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사시팔경도화첩(四時八景圖畫帖)](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표훈사도(表訓寺圖)](57.3×38.5cm, 개인 소장)⋅[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개인 소장)⋅[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개인 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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