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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진섭(吉鎭燮) -

- 생몰년 : 1907~1975
- 국    가 : 한국


吉鎭燮 1907. 2. 20.~1975. 9. 7.

한국의 화가.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길선주(吉善宙, 1869~1935,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장로 교회 목사⋅교육가)의 아들로,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1932년 일본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에 정착, 우리 나라 최초로 1918년 창립된 순수 근대 미술 동인회(同人會)인 서화 협회(書畫協會) 전람회(協展)와 목일회(牧日會) 동인전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목일회는 1934년 결성되어 활동하였던 서양화가들의 단체로, 서울 종로(鐘路)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에서 제1회 작품전을 가졌다. 그러나 단체의 이름이 일본을 배격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사용 금지당함에 따라 모임이 해체된 상태였다가, 1937년 이름을 목시회(牧時會)로 바꾸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회원은 길진섭을 비롯하여 구본웅(47)⋅김용준(86)⋅백남순(211)⋅송병돈(宋秉敦, 1902~1967, 한국의 화가)⋅신홍휴(申鴻休, 1911~1961, 한국의 화가)⋅이마동(407)⋅이병규(412)⋅이종우(464)⋅임용련(486)⋅장발(495)⋅황술조(623) 등 주로 도쿄 미술 학교 출신이었다. 그림의 성향은 대개 일본 양화(洋畫)의 기법을 따르는 보편적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와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범주였으나, 파리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순수주의(純粹主義, purisme) 사조(思潮)를 따르는 야수파(野獸派, fauvisme<Wild Beasts>)적인 표현이나 과감한 반전통적 방법을 시도하는 성향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사회적 배경과 양화에 대한 인식의 저하를 극복하지 못하고,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단체였던 목시회는 1938년 ‘9인 양화 동인전’을 끝으로 활동을 마감하였다.

1936년 일본 문부성(文部省) 주최의 미술 전람회(文展)에 [모자(母子)]를 출품하여 각광을 받았고, 1940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광복 직후 서울 대학교 미술 대학 창설 때 교수로 재직하였다.

조선 조형 예술 동맹(朝鮮造型藝術同盟) 부위원장, 조선 미술 동맹(朝鮮美術同盟) 서울 지부 위원장을 지냈고, 1947년부터 조선 미술 동맹 위원장으로 좌익(左翼) 미술계를 이끌었다.

1948년 8월 월북(越北)하여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 대표자 대회에 조선 미술 동맹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 대회에서 북한에 조선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게 한 조선 최고 인민 회의(朝鮮最高人民會議)의 남한 쪽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평양 미술 학교(平壤美術學校) 교원(敎員)을 지냈다.

작품으로 [정물(靜物)](1940년)⋅[소녀(少女)]⋅[원주 풍경(原州風景)]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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